no. 52 예술은 영혼을 살찌우는가?

예술은 영혼을 살찌우는가? 적어도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뜨게 해주진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라야 창작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문화 소비자에 그치지만 책, 음악, 미술이 없으면 어떻게 삶을 살까 싶다. 지금은 무척 비가 많이 온다. 물 부족이라는 호주의 퀸즐랜드는 한번 비가 오면 무섭게 쏟아질 때가 있다. 정말이지 빗소리가 후두둑 후두둑, 천장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그래도 창가에 앉아서 어울리지 않게 탱고를 들으면서 노트북을 두드리니 괜스레 마음이 꽉찬 것 같다.

#1 하루키 단편 소설...

어제 시티 도서관에 등록을 했다. 학교 도서관은 생각보다 소설책이 많지 않다. 심심할 때 소설을 읽으려도 친히 시티에 행차하여 도서관 등록을 하고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하루키 소설을 찾아봤다. 난 하루키가 외국에서도 유명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호주에서는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참고로 호주는 호주 출신 소설가층이 의외로 두텁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다음이 영국에서 건너온 소설들이 많았다. 암튼, 서가에 놓인 하루키 소설은 단편집이 전부였다.


단편 모음집인 듯 한데, 읽어본 소설도 있고 처음 보는 단편도 있어서 빌려왔다. 사실 난 영어로 된 책을 읽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어휘의 빈곤 때문인지, 정서상 그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인지, 텍스트북이면 몰라도 소설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키의 단편은 하루키 특유의 분위기가 익숙해서 인지 다른 소설보다 읽히는 감이 있어서 좋다.

얼마만의 독서인지, 이곳에 온 이후로 이렇게 여유롭게 책을 읽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래서 방학이 좋구나.

#2. 생각지 못한 미술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현진 언니와 만나 점심을 먹고, 다리 건너 뮤지엄으로 향했다. 원래는 피카소 전을 볼 예정이었다. 아트 갤러리를 지나쳐 가다가 눈에 띄는 그림이 있어서 잠깐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피카소 보다 내 마음을 더 꽉 채워준 그림들을 만났다.

호주의 미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에보리진들의 특유의 독특한 그림? 나 역시 그랬다.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는 Sidney Nolan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의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Sidney Nolan
Ned Kelly 1946

전체적으로 따뜻하면서도 화려한 색감, 그림마다 등장하는 저 알 수 없는 주인공 때문에 이끌렸다. 그리고 이곳이 정말 호주구나, 느낄 수 있는 호주의 자연 풍광들이 정감있다. 위의 그림은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인 듯하다. 그의 그림들을 보니 이번 학기가 끝나면 시드니도 좋고 맬버른도 좋지만 꼭 한번 울룰루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중심?^^ 왠지 영화 때문에 그 세상의 중심에 가서 모래 가루라도 뿌려야 하는 건 아닌가 싶지만, 왠지 그곳에 꼭 한번은 가야 할 것 같다.

요즘 한참 무료했는데 그의 그림을 보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엽서도 잔뜩 사왔다. 계산할 때, 생각보다 비싸서 살짝 놀랐지만, 나에게 이런 기분을 선사했는데 그깟 몇 십불쯤이야, 하고 기분이 들떠서 돌아섰다. 여기 온 이후로 자주 연락 못했던 지인들에게 엽서를 보내야 겠다. 흔한 호주의 풍광 엽서보다 훨씬 특별하다는 느낌도 들고 말이다.


밖으로 돌아서는데 강 건너 브리즈번 시티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이런거야 말로 안구정화 아니겠는가? 정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그 느낌을 글로 표현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3. 그림의 측면 감상하기

당신들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할 때, 자신들이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근래에 느낀 습관이지만 나는 그림 앞에 서서 바로 앞 그림이 아니라 옆의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다. 그림의 측면 감상하기라고나 할까?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옆의 그림에 눈이 간다. 처음에는 급한 성미 탓이려니 했는데, 미술관에 가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느끼는 거지만, 그림을 앞에서 보는 것보다 옆에서 보는게 더 특별해 보인다. 적어도 나에겐. 측면에서 그림을 힐끔힐끔 관찰하다가 다가가 정면으로 보면 생각보다, 이게 아니었는데 하곤 한다.

왠지 그림을 정면에서 들여다 보면 그림과 내가 대결하는 구도 같아 보인다. 내가 작가도 아닌데, 그림과 정면으로 맞서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옆에서 보면 아름답다, 신기하다고 느낀 그림 속 풍경이 정면에서 보면 평범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오늘도 난 미술관에 가면 그림의 측면을 몰래 살펴보곤 한다.

당신들도 직접 미술관에 간다면 '작품의 측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뭐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서 살펴보아도 좋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림의 왼쪽에 서서 보기를 좋아한다. 책을 통해서 평평하게 느껴지는 그림이 아니라, 직접 내 눈앞에 놓여진 그림을 내가 원하는 위치에서 마음껏 그림을 훔쳐보라!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

#4. 다시 만난 까미유 코로(Camille Corot)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참 열악한 환경인 것 같다. 물론 내가 그쪽으로 조예가 깊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에 있을 때 간 미술전은 대부분 외국 유명 작가의 개인전이었는데, 그마저 유명한 작품들은 들여오지도 못했고, 그림의 배치도 전문가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아니다 싶었다. 가장 중요한 건, 피카소 전이었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붐비는 바람에 사람들에 떠밀려 그림을 보고 빨리 나와서 그제서야 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있다.

Sidney Nolan전은 다른 전시회랑 연결 되어 있어서 함께 보았는데, 여러 작가의 작품을 시대별, 특징별로 간략하게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보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 있는 조각의 로댕, 그림은 피카소, 드가, 르누아르까지 다양했다. 우리 나라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한 풍경화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그림. 역시나, 까미유 코로 였다.
Camille Corot
Ville d'Avray 1865

대학에 처음 들어와서 였다. 좋아하는 미술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하는 "고흐"라고 대답하기가 싫어서 방학 때 혼자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기존에 전혀 지식이 없던 나에게 모든 화가들이 다 새롭고, 대단해 보였지만 내 마음에 가장 많이 남았던 화가가 바로 "까미유 코로"라는 프랑스 화가 였다. 그녀가 그린 풍경화는 화려하진 않지만 은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특히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정말 한없이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그 많던 그림 사이에서 내 눈을 끌었던 그림도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다. 물론 저 그림은 아니었고, 좀더 어두운 느낌의 풍경화였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을. 갑자기 잊고 있던 그때가 기억 나면서 또 훈훈해졌다.

the end

예술이 영혼을 살찌우는지는 명확하게 느낄 수 없었지만, 예술은 때때로 마음을 꽉 차게 한다.


참고로 Sidney Nolan에 대해서 (클릭)

by 섬진강 | 2008/07/05 11:07 | 빨강머리 앤 | 트랙백 | 덧글(0)

no. 51 대한민국 20대, 할 말 많습니다.

미디어를 지배하는 배후는 누구일까? 아, 아니, 대중문화 시장을 지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더 친절하게 말하면, 대중문화의 소재 선택의 결정인자는 무엇일까? 그렇다. 바로 구.매.력. 구매력을 가진 타겟층의 구미에 맞추어 소재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 대한민국의 20대로서 한 마디 하자면, 대중문화 시장에 20대의 요구나, 관심, 고민들 바탕으로 하는 것들이 무척이나 부족한 듯 하다. 실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소설, 영화, 드라마 시장에 한정되어 있긴하다.

잘 생각해 보시라. 대한민국 20대를 대표할 만한 작가가 있는가? 실은 이런 말을 하면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난 한국의 현대문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전무하다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로서,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소설이 아직까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창비에서 우연히 "김애란"작가의 작품을 보고, '오, 이거다.' 싶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이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냐, 너? 내 블로그의 글들은 대부분 정돈되지 않은 글이다. 뭐 어떠하랴? 종이가 인내심이 많다면 온라인 블로그는 링크의 링크를 거듭하는 무질서 속의 질서와 연결 아니던가? 내 글도 과연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호주에 있는 지금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바로 "달콤한 나의 도시". 원작 소설을 알게 된건 아마 2006년 인가 였던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 풍의 일본 소설을 지독히 싫어하듯, 정이현 역시 아예 나의 관심 밖이 었다. 이런 말 죄송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작품성 등등 모든 것을 떠나서 그저 개인적 취향 탓으로 정이현 씨 소설은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쨌튼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는 대한민국 30대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 30대. 30대에 대한 이야기가 브라운관을 점령했고, 평균 40대의 불륜 이야기느 시청률의 구세주로 딱이다. 언제부터 였을까? 나 어릴 적만 해도 "한지붕 세가족" 같은 가족 드라마가 있었고, 한창 10대 때에는 "학교"같은 청소년 드라마가 있었고, 잘 모르고 봤지만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서울의 달'같은 드라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Nono~.

다들 아시다 시피 시청자 층이 달라졌다. 많은 10대 20대는 본방을 보기 보다 인터넷을 통해 시청하는 것이 편하다. 친구들 끼리 장난스레 이야기 하지만, 90년대 그 다양하고 많았던 황금 시간대 만화영화들이 요즘은 그 전성기를 보내 버린 이유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학원, 과외에 바빠 6시에 집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처럼. 광고를 따내기 위한 시청률에 도움이 안되는 시청자층을 고려할 만큼 방송국이 한가하지 않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보면서 그냥 안타까웠다. 30대를 향한 드라마는 그들을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 그대로 스케치하려 노력하고, 그들에게 메세지를 전해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읽진 않았지만, 소설 역시 그런 메세지를 던지고 있지 않을까? 한편 20대는 어떨까? 사람들은 대한민국 20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88만원 세대라는 말 말고,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나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진정으로 원한다. 무언가 새로운 시선을 던져 줄 수 있는 20대 작가가 나오기를. 말하고 싶은데 표현할 수 없는 그, 가려운 그 무언가를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는 20대 작가가 나오기를.

박진영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봤다. 노래에서 중요한 건 가창력이 아니라, 가사 전달력이라고. "말하듯이 노래 해라!" 대중 음악의 특성을 제대로 간파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노래의 느낌을 전달하는 건 그 사람의 가창력이 아니라, 어떻게 전달하느냐, 어떻게 음악을 받아들이도록 포장하느냐이다. 그게 호소력이라면 호소력이겠지.

나는 이와 똑같은 말이 글쓰기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글쓰기가 아닌 다음에야 소위 "문체"라고 말하는 것이 소설이나 픽션에는 필요하다. 누군가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으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글을 통해서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느낀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공감하라고 강요할 생각 따윈,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구나' 이거다. 물론 작가에게는 사람을 끄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겠지.

나는 작가도 아니고, 작가 지망생도 아니지만, 내 목소리를 통해서 나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누군가 이해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글쓰기란 그런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문체...(클릭)

by 마그론느 | 2008/06/28 02:48 |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 트랙백 | 덧글(0)

no. 50 사랑의 유통기한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 중경삼림 중, 금성무의 독백...




연애는 항상 나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설사 자신의 연애가 아닐지라도, 연애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인지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있어 하는지도 모른다.

우연찮게도 최근 내 주변에서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이유로. 이러한 우연이 겹치고 겹치자, 처음으로 이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중경삼림에 나오는 저 대사를 듣고 "당신들"은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있습니까? 영화상에서 큰 임팩트는 없지만 명대사를 던지고 사라지는 금성무의 저 유명한 대사처럼, 사랑에도 정말 유통기한 이라는게 있는 것일까?

만약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게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정말 통조림처럼 누군가에 의해(?) 찍혀져 나온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기한이 되면 이별을 예감하고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는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 질문에 대해서, yes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별" 이라는게 쉬운 문제가 아닌 것처럼 결론 역시 쉽게 내릴 수 있는게 아닌 것 같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결국 나의 결론은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구실이 하나 둘 줄어가고, 이별을 하기 위한 이유가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일 뿐" 이다. 적어도 지금 내가 느끼기엔. 뭐 결국엔 그게 유통기한이 되는 것인가? 

실은 내가 말하고 싶은건, "유통기한을 자신이 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인가"의 차이이다. 이 글을 읽게 될 "당신들"은 어떻다고 생각할까? 우선 둘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도 있고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스스로 여기까지, 이제 이별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과, 지금이 이별을 해야 할 순간이라고 느끼는 건 다른 거니까. 하지만 따지로 보면 내 스스로 유통기한은 정해 놓고, 자기 자신에게 '지금, 모든 것이 이별을 향하고 있어.'라고 합리화 시키는 경우를 생각하면 본질적으로 크게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내가 "이별"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로 돌아가면, 모두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연애 기간을 거쳐, 유사한 상황에서 이별을 고했다. 뻔한 것, 그렇고 그런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라고 여겨지기에 충분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뻔한 것, 허나 본인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정작 나에게 다가올 줄 몰랐던 상황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몸에서 멀어지만, 마음에서 멀어진다나? 누군가는 완강히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하게 말하지만,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저 말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뻔하고 뻔한 일이 결국은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왜 헤어졌어요? 왜 이혼하셨어요?라고 묻는다면 뻔한 대답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가 좋아서 사귀게 되었어요? 무엇때문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셨어요?라고 묻는 말에 참신한 답을 생각하려 고민하는 것이, 어쩌면 바보 같은 일인 것처럼. 하지만 본인 조차 인정하기 싫은 뻔한 대답이야 말로, 말로서 뱉어질 수 있는 이유이고, 그 뻔한 말로 읊조리면 허무하지만, 이별까지의 상황을 되돌이켜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이별의 이유이다.

글을 쓰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흘러가 버렸지만, 결국 이 글은 "이별"에 대한 글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별의 시기" 곧 "이별의 이유"에 대한 글이다. 이 때가 바로 이별의 시기입니다, 그게 바로 이별을 해야 할 이유입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 건 헛소리다. (That's totally bullshit!;;) 그 뻔한 답을 뻔히 알고 있는 것도 이별의 당사자들이니까.




지금 나에게 이별이 닥친다고 상상한다면,

by 마그론느 | 2008/06/21 01:17 | 오만과 편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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